“향기는 시, 소리 없이 많은 것 보여주죠”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6월 16일

자크 폴주는 작금의 향수업계에서 최고의 기념비적 인물로 통한다. 샤넬하우스의 역대 세 번째 조향사이며, 가장 여성적인 브랜드 샤넬에서 남성 향수로 이름을 알린 점 등은 그를 더욱 유명하게 했다. 세계 향수의 수도로 불리는 프랑스 그라스의 장미꽃 농장에서 폴주를 만났다.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장미를 코끝에 대고 향기를 맡았다. 



조향사는 코로 수천 수만 가지의 향을 구분한다. 그래서 ‘코’라고 불린다. 우리가 만난 ‘샤넬의 코’는 1981년 남성용 향수 ‘안테우스’를 만든 이후 ‘코코’(1984), ‘에고이스트’(1990), ‘알뤼르’(1996), ‘코코 마드모아젤’(2001), ‘샹스’(2003) 등을 창조했다. 





-그라스를 ‘향수의 성지’라고 하던데요.




샤넬의 고전 향수 ‘No.5’와 꽃에서 추출한 원료 농축액을 앞에 두고 포즈를 취한 자크 폴주.


“그라스엔 만·쇼베·로베르테 등 거대 향료회사와 몰리나르·프라고나르·인터내셔널 드 라 파퓌므리 등 유서 깊은 향수업체들이 수백 년 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원재료 생산부터 관리, 각종 추출법까지 모든 노하우가 이곳에 있죠. 때문에 조향사라면 누구나 일생에 한번쯤은 그라스에서 일하기를 꿈꿉니다. 또 불가리아산 장미나 인도산 재스민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지만, 저뿐 아니라 ‘겔랑’의 장 폴 겔랑, ‘장 파투’의 장 케를레오 등 럭셔리 퍼퓨머리 조향사들은 그라스산 장미와 재스민을 최고로 칩니다. 몇 배 비싸지만 경제적인 희생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죠.”



-샤넬 No.5가 ‘향수의 고전’인 것과 비슷하군요.



“그렇죠. No.5 역시 비싸지만 소장할 가치가 있는 향수입니다. 생전의 샤넬 여사는 “인간이 창조한 ‘인공적인 향’을 여성들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1921년 러시아 황제의 조향사 손을 빌려 세상에 없던 향기를 만들어냈죠. 그라스가 향기의 비밀을 안고 있듯 No.5를 만드는 전 과정도 암호화돼 있습니다.”



-1921년에 만들어진 향수인데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요?



“또 샤넬 여사의 말을 빌리자면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비결은 덜어내고 단순화해 정수만 남기는 것’입니다. No.5에는 여성성과 현대성이란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또 그동안 대중이 원하는 만큼 변해왔습니다. 오리지널 포뮬러를 보호하되 오데토일렛, 오데퍼퓸 등 여러 버전으로 끊임없이 변신했습니다. 완벽한 만큼 더 대담하게 바꿔야죠. 그런 활력이 없으면 시간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샤넬은 에르네스트 보(No.5)와 앙리 로베르(No.19) 같은 전설적인 조향사를 배출했죠. 선배들에 대한 압박감은 없습니까?



“창조적인 영감을 얻으려면 그런 압박에서 자유로워져야죠.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샤넬에서 일하는 건 행운입니다. 다른 조향사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포뮬러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전통에 첨단기술과 모더니즘을 더해 새로운 향을 만듭니다.”




프랑스 그라스의 꽃밭을 찾은 조향사 자크 폴주가 25년 된 나무에서 자란 장미 향을 맡아보고 있다. 그는 코로 수만 가지의 향을 구분하는 ‘샤넬의 코’다.

-어떤 여성에게서 영감을 받습니까? 또 어떤 여성들을 위해 만듭니까?



“특정한 여성을 떠올리는 건 아닙니다. 여성의 이미지가 아니라 향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합니다. 저는 대중을 위한 향수를 만듭니다. 더 많은 여성들이 제 향수를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향기란 개개인의 체취와 만나 변하는 거니까요. 그래도 힌트를 원한다면, 광고 모델인 케이트 모스, 바네사 파라디, 키이라 나이틀리를 떠올려 보세요. 또 브랜드에도 성이 있다면, 샤넬은 명백히 여성입니다. 그런 곳에서 남성을 위한 향기를 만들었다는 건 제 자부심 중 하나입니다.”



-어떤 훈련 과정을 거쳐 조향사가 되나요.



“저는 보클뤼즈 지역 출신입니다. 그라스 인근이에요. 엑상프로방스에서 문학과 영어를 공부했습니다. 특히 시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죠. 그러다 그라스의 한 회사가 뉴욕지사에서 일할 조향사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모험심이 생겼습니다. 미국에서 2년을 보낸 뒤 파리로 돌아와 루르-베르트랑-듀폰 밑에서 일했죠. 그리고 샤넬의 일원이 됐습니다. 벌써 33년 전 일이네요”



-시와 향수는 어떤 관련이 있나요?



“향기란 시의 한 형태입니다. 소리 내 말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보여주죠. 시의 공감각적인 훈련이 향수 이미지를 떠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작품들 중 가장 자랑스런 향수는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향수입니다. 제 상상의 세계 속에서는 더 좋은 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펼쳐지니까요. 지금까지 만들었던 작품 중에서 꼽자면 ‘코코 마드모아젤’과 ‘에고이스트 푸르 옴므’입니다. 코코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반대로 에고이스트는 그만한 반향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가네요.”



-경쟁 회사의 제품도 참고합니까?



“그럼요. 당연히 맡아봅니다. 시야를 가리고 앞으로만 달려나가는 경주마가 돼선 곤란하니까요. 전후·좌우를 두루 살펴야 합니다. 겔랑이나 장 파투처럼 제대로 된 원료와 조향법을 가진 향수들은 모두 시향합니다. 특히 지금은 나오지 않는 고전 향수들을 좋아합니다. 사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향에 호기심이 생깁니다. 공항 면세점에서 브리트니 스피어스, 제니퍼 로페즈 같은 스타들의 상업적인 향수도 맡아볼 정도니까요. (-어떻던가요?) 글쎄요. 그게… 허허허.”



글=이진주 기자 사진=프레데릭 아틀랑(프리랜서)







‘세계 향수의 수도’ 그라스 

가죽 악취 없애는 기술 개발하며 ‘가죽의 도시’서 ‘향기의 도시’로





남부 지중해의 쪽빛 해안 코트다쥐르. 프랑스의 칸과 니스, 모나코의 몬테카를로에 이르는 아름다운 해안선으로 유명한 이곳에 ‘세계 향수의 수도’라는 그라스가 있다. 가죽 제품을 생산하던 프랑스의 소도시 그라스는, 18세기 무렵 가죽의 악취를 제거하는 향료 제조법을 개발하면서 ‘향기의 고향’이 됐다. 비가 많이 내리지 않는 온난한 기후 때문에 방향성 식물이 자라는 최적지다. 독일의 은둔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도 소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1985년 발표)’를 쓰기 전 취재여행을 왔다. 천재적인 후각을 가진 주인공 그르누이가 ‘고체 지방을 이용해 (여인의) 향기를 붙잡아두는 법’을 배우는 곳이 바로 여기다.



초여름 그라스의 들판은 ‘로자 상티폴리아’ 품종의 분홍색 장미가 뒤덮고 있었다. ‘5월의 장미’는 이름 그대로 5월 한 달 동안만 핀다. 이 한 달간의 수확이 1년의 향수 생산량을 좌우한다. 가장 품질 좋은 장미는 ‘무슈 뮬’의 농장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 농장의 장미는 샤넬사가 독점하고 있다.




‘캥거루 주머니’를 찬 슬라브계 소녀들이 손으로 일일이 장미를 딴다(사진 위). 5월의 장미 ‘로자 상티폴리아’는 최고의 향수 원료다.

뮬씨의 농장을 찾은 지난달 18일, 아침 일찍부터 장미를 수확하느라 분주했다. 한낮의 뙤약볕에 꽃이 까부라지지 않도록 서두르는 것이다. 꽃은 일일이 사람이 손으로 딴다. ‘캥거루 주머니’라고 불리는 앞치마를 두른 여인네 수십 명이 밭을 가득 채웠다. 슬라브계 소녀들의 오똣한 콧날을 타고 땀방울이 미끄러져 내렸다.



이 농장엔 7헥타르(7만㎡, 2만1175평)의 ‘장미’ 밭과 5헥타르(5만㎡, 1만5125평)의 ‘재스민’ 밭이 있다. 밭 한쪽에선 25년 된 장미나무도 자란다. 일반 장미의 수명은 5~6년 정도다. 성인 남성만큼 키가 자란 굵직한 나무엔 탐스러운 장미가 피었다. 이런 장미는 접붙여서 건강한 후손들을 계속 생산해낸다. 말로 치면 ‘종마’인 셈이다. 다른 땅에는 장미와 재스민 외에도 아이리스 같은 꽃을 섞어 심어 지력을 살린다. 흙 성분을 분석해 부족한 유기 비료를 주는 등 과학적으로 관리한다. 그 때문인지 꽃 향기가 흙 내음을 가릴 정도로 강했다. 



품질 관리도 엄격하다. 뮬씨는 “꽃망울이 맺히기 전부터 몇 달 동안 살충제를 치지 않는다”고 했다. 30도에서 향수 원료를 저온 추출한 뒤 알코올 용제(헥산)로 3번 씻어낸다.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농약 성분도 이 과정에서 다 걸러진다”는 설명이다. 장미꽃이 내주는 향기는 생각보다 인색하다. 장미 400㎏을 거대한 찜통에 넣고 찌면 왁스 형태의 향수 원료가 1㎏ 나온다. 이를 다시 정제하면 농축액 600g이 나온다고 했다. 꽃을 따고, 찌고, 에센스를 만드는 모든 과정이 이 농장 안에서 이뤄졌다.기고자 : 이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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