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화학 서형제씨

[중앙일보] 입력 1993년 03월 15일


『조향은 예술이다. 음악을 작곡하 듯, 물감을 배색해 그림을 그리 듯 여러 가지 향을 배합해 새로운 향을 탄생시킨다』향수나 화장품·비누 등에 쓰이는 각종 향기를 만들어내는 조향사 서형제씨 (32·태평양화학 중앙연구소 향료연구실 선임연구원).
숭실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이후 「후각이 뛰어나」 89년부터 조향사의 길을 걷게 된 그는 오선지를 보고 음률을 떠올리 듯 머리속에서 자유자재로 냄새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다.
버스속에서 옆자리 여성이 사용한 화장품이 어느 회사의 어떤 제품인지는 물론 세계 유명향수들을 냄새만으로 모조리 알아맞힐 수 있다는 그는『현재 향수 및 그 원료들을 거의 외제에 의존하는 것은 국내 조향사들의 유기합성실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 국내 시장이 크지 않아 수입품의 가격이 더 저렴한 탓』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이 세상에 인간이 접할 수 있는 냄새는 모두 40만종.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향의 대상이 되는 것은 천연향 2백종, 합성향 1천여종이다.
그가 입사초기나 지금이나 출근해서 하는 일은 각종 냄새를 익치고 기억하기 위해 부단히 냄새를 맡아두는 것, 자연의 냄새를 추출 합성하고 조향하는 것 등이다.
『냄새도 맡지 않으면 잊어버린다』는 그는 여러 가지 냄새가 혼재된 속에서 자신이 맡고 싶은 냄새를 연상하면 곧. 그것을 찾아내 맡을 수 있게 됐다.
향기는 몇개의 군으로 크게 나눌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향수를 만드는데는 1백50∼2백가지의 원료가 섞이게 된다. 때문에 자신이 구상한 배합 처방으로 원하는 냄새를 만드는데 어떤 때는 1백여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기도 한다.
처음에는 향이 좋다가도 시간경과 후 변하는 것, 향수자체의 변색, 이를 도포한 피부의 안전성 등을 고려해 사용해본 후 다시 수정을 가하기도 한다.
그는 향이 후각적 만족을 줄 뿐 아니라 스트레스해소· 긴장완화· 활력증진· 각성 등의 심리적 효과도 있다고 덧 불였다.
『사람들이 화장품·세제 등을 선택할 때 포장 다음으로 냄새에 영향을 받는다』는 서씨는 냄새에 대한 소비자 공통기호를 찾아 가능한 한 많은 소비자가 좋아하는 향을 개발해 내는 것이 조향사의 최대 관심사라고 전했다.
그가 자신이 만들어낸 향 중 자랑으로 삼는 것은 태평양화학의 분말세제「빨래박사」의 향. 감귤냄새와 자스민향을 혼합, 빨래 후의 청결감을 드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
또 설악산 오색약수터에 가서 삼림냄새를 포집, 이를 활용한 건물 내부 살포용 삼림욕향, 조향팀의 다섯 연구원들과 함께 들의 쑥을 채집하고 향을 추출해 쑥향 비누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향료는 제품 원료 중 0·2~0·3%를 차지한다해도 실제 원가에 미치는 영향은 30%에 육박하는 고부가가치상품인데다 경제적 여유증진과 함께 소비가 급증하는 만큼 앞으로 조향사의 직업적 전망은 밝은 편』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내 조향사는 15명 정도.
지난해의 홍콩연수에 이어 최근 프탕스 향료의 본고장이랄 수 있는 그라세에 9개월간의 연수를 떠났다. 그의 수입은 이 회사 연구원이 받는 수준이다. <고혜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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